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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규찬] 인간의 신체, 신자유주의 최종의 시장

세계화와 민중  제29호
전규찬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unacom@knu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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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진실이 아니다. 현실주의적 과학도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담론이며 그 효과이다. 정확히 말해, 특수한 경제 이념에 맞춰 현실을 (재)구성코자 하는 자본의 권력 의지이자 담화 전략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실감되는 그 현저한 위력이라는 것도 시장의 힘 자체보다는 전쟁도 불사하는 지원국가와 IMF, OECD 등 세계기구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담론의 힘에 더 크게 기인한다.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를 ‘순수하고 완전한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하나의 이론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순전한 수학적 허구에 불과하다. 엄청난 추상성을 기초로 출발한 이 이론은 합리성 문제를 개인의 합리성으로 환원시키며, 그리하여 합리성의 생산·적용을 제한하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을 완전히 괄호로 묶어버린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상상계의 이론은 고도의 집중화, 체계화된 담론화 과정을 통해 현실을 설명하는 그럴듯한 과학적 기술로 변신한다.

아무튼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담론은 경쟁과 효능성이라는 경제 논리를 앞세워 형평성의 원칙이라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회 논리를 장 밖으로 추방한다. 사회가 존재할 여지는 그만큼 줄어든다. 대신에 지구상의 시장을 완전 정복하겠다는 자본(주의)의 끝없는 야심이 득세한다. ‘제국’의 완성을 위해 국가 복지, 사회적 책임의 규칙들은 하나하나 지워진다. 그 전략이란 간단하다. 다중을 포획·포섭하라! 어떤 방식으로? 끝없는 말 즉 담론의 생산, 그리고 새로운 주체 구성을 통해서. 자본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자신의 특수한 욕망을 소비자의 보편 이익으로 환치시킨 말들을 내놓는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절대 진리, 보편 신념으로 앞세운다. 개인을 보살피는 가장 완벽한 프로그램인양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자랑한다. 개인은 완전히 국가와 대치된다.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압살하는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다. 자유와 선택에 반하는 억압적이고 무능하며 전체적인 제도로 죄악시된다.

‘국가 대 개인’이라는 대당 관계 수립과 함께 신자유주의 자본은 철저히 개인화된 새로운 유형의 소비 주체를 만들어낸다. 국가나 역사, 사회라는 말 자체를 부담으로 느끼는 지독하게 가볍고 즉각적인 쾌락, 즐거움의 소비자를. 반국가주의 담론이 ‘전문가’들의 이론적인 말과 글을 통해 강화된다면, 이 소비 주체 구성의 담론은 광고나 뉴스 등 훨씬 일상적인 채널을 통해 생산된다. 전자가 의식에 소구한다면, 후자는 무의식에 어필한다. 그래서 후자는 훨씬 더 치명적이다. 의심을 갖기 전에 이미 ‘우리’는 온갖 탁월한 기교들로 꾸며진 자본이 메시지에 의해 호출되어 버린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에 감동 받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자연스럽게 카드 든 소비자로 시장에 호명되는 것과 같다. 영화보다 더욱 미적인 광고들이 자유스러움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이들 메시지는 자유를 말이 아닌 감각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자유를 구속하는 원흉인 국가의 개입이 완전 배제된 시장이라는 천국에서 ‘마음껏 즐기시라’고 유혹한다. 쉿! 카드와 돈을 들고 말이요......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파티장으로 신비화한다. 자유로운 삶이 가득 찬 해방 공간으로 미화한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지구상 모든 잠재적 시장을 현실화시키고자 열중한다. 그만큼 시장 집착적인 괴물이다. 이 흉폭한 야수는 시장을 유일 메뉴로 해 목숨을 지탱하며, 그것 없이는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서 사회주의 블록은 차치하고 아프리카 오지조차 유효반경 내로 포획하여 게걸스럽게 해치운다. 지리적으로 지구 위 시장의 바깥은 없다. 북한고 같은 봉쇄지대가 있지만, 이들이 시장의 외부로 영원히 남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면 시장 팽창은 지리적으로 끝난 상태인데, 그래서 여기서 멈출 것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자본이 확장을 중지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길이다. 없다면 만들어 내놓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서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것인가? 바로 소비자라는 이름의 인간 주체 위에, 그들의 무한한 욕망 위에,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들의 생생한 신체와 살갗 위에.



그리하여 90년대 ‘신세대’라는 새로운 소비 주체를 만들어내면서 본격 가동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도 또 다른 소비 주체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열중한다. 어린애들을 ‘아동’ 마케팅으로 포획한다. 최신 유행하는 ‘얼짱’, ‘몸짱’ 현상은 아이들의 자발적 코드가 아니다. 이들의 연약한 신체를 상대로 한, 이들의 미성숙한 욕망을 개발, 표준화하기 위한 상품 자본의 산물이다. 디지털 기술과 일본중심문화, 그리고 아이들의 자유 성향과 결합된 복잡한 문화현상임에 틀림없지만, 최종 심급에서 작용하는 신자유주의 전략을 결코 놓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사물화 코드는 ‘웰빙 문화’에서도 드러난다. ‘웰빙’은 ‘얼짱’에 비해 훨씬 음흉하다. 상품화 전략에 덧붙여 계급 불평등 은폐의 선전효과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웰빙’은 생산관계의 모순을 소비취향의 문제로 왜곡시킨다. 또한 특정 계급의 생활 패턴을 보편적 유행으로 가장한다. ‘웰빙 문화’는 중·상층의 특수한 삶의 방식이다. 그 배타적 계급 문화가 시장 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문제로 성격이 뒤바뀐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진정 중요한 고용의 문제, 공평한 분배의 문제, 임금 향상의 문제는 이 과포화된 담론에 의해 덮여진다.

‘얼짱’, ‘몸짱’, ‘웰빙’은 인간 신체를 표적으로 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시대의 반문화적 상품 미학이자 거짓 정체성이다. 특히 ‘웰빙’은 생명의 가치를 내세운 매우 반생명적으로 반자연적이며 반생태적인 문화이다. 축적을 위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이 부추기는 사기 품목이다. 그 천박한 유행이 거대자본과 이들의 광고선전물, 그리고 자본주의 매체들의 홍보성 기사를 회로로 해서 재생산된다. ‘와인족’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4~50대 소비주체를 <제일기획>이 엔지니어링하고, 이를 <중앙일보> 등 주류 매체가 사이비 기사로 선전하며, 그래서 삼성 등 재벌의 시장 확장을 도모하는 식이다. 보수 신문과 방송은 신자유주의의 전위에 불과하다. 매우 친숙한 얼굴로 생활 깊숙이, 신체 가까이에서 작용하는 자본의 파수견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반사회적인 괴물로, 디스토피아적 악몽으로 의식하기 결코 쉽지 않다. 무의식으로 우리를 낚아채 버린다. 임금을 줄이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키워야 하며 ‘공적 부담금’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개인의 자유, 개인의 선택, 개인의 행복이라는 현혹적인 메시지를 반복함으로써 나/우리의 신체를 야금야금 갉아 먹어간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장체제에서 늘어나는 것은 소외와 나르시즘이다. 거꾸로 줄어드는 것은 관계와 소통, 유대의 기회이며 이를 통해 가능한 사회의 구성 가능성이다. ‘웰빙’의 담론에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스런 현실은 지워진다. ‘웰빙족’의 매끈한 몸매에 노동 대중의 거친 얼굴이 가려진다. 이들을 지속적으로 추방하는 생산 현장의 척박한 상황이 망각된다. 이런 사회 현실로부터 눈 돌린 채 요가나 하고 ‘느림’을 추구하거나 유기농 음식이나 먹으며 잘 먹고 잘 살라 유혹하는 ‘웰빙’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신체의 최종 식민화를 꿈꾸는 자본이 낳은 상품은 인간에게 결코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허위 문화의 반인간적 뿌리를 폭로해야 한다. ‘웰빙’, ‘몸짱’ 배후의 신자유주의적 허구성이 정확히 드러나야 한다. 인간 신체의 정복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지탱될 수 있지만, 이에 실패할 때 그 기획은 결정적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신체는 신자유주의와 이에 반하는 운동 사이의 중대한 다툼 현장으로 위치한다. 진보적 문화 실천의 결정적 지점이 된다. 각종 매체가 떠맡은 ‘웰빙’의 이념 공세로부터 나의 욕망을 해방시키는 운동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대안의 사회를 꿈꾸는 운동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다.

*사진출처 : 네이버(위), 한겨레신문(아래)
 

2004-05-04 18: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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