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일한FTA(자유무역협정)정부간 교섭이 시작된 11월1일부터
마지막 날인 11월3일까지, 일한의 노동·시민사회 단체가 도쿄의
외무성 앞에서 일한FTA저지의 공동투쟁을 펼쳤다.
한국에서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필두로, 국회에 10석을
장악한 민주노동당, 농민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민중연대, WTO반대 국민 행동 등 14단체 총 약100인으로
일본 원정 투쟁단을 구성했다. 일본에서는 일한FTA에 반대하는
세력이 모여 [일한FTA교섭에 반대하는11월 한일 공동행동
실행위원회]를 구성해 이번 공동투쟁에 임했다. 실행 위원회는
‘중소노조 정책네트워크’, ‘이의 있음! 일한자유무역협정’,
‘전통일노동조합’, ‘탈 WTO 풀뿌리 캠페인’등 노조,
시민사회 단체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50여 단체가 여기에
찬동하고 행동에 참가했다.
한국원정투쟁단이 도착한 31일, 한국투쟁단과 일본실행위의
스텝은 숙소에 모여 향후 일정과 주의사항 등 정보를 확인하는
등 다음날의 투쟁을 준비했다. 날이 밝아 투쟁 첫날이 되었다.
원래 이 날은 외무성에 면담요청서를 제출하고, 정문앞에서
항의행동가 연좌 농성을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전
8시 외무성으로 향하던 투쟁단은 외무성 앞 교차로에서 저지선을
치고 투쟁단을 가로막는 경찰과 마주쳤다. 그들은 공동투쟁단의
외무성 정문 접근을 실력으로 방해한 것이다. 이에 대해
투쟁단은 항의행동은 정당하다며 경찰 측에 항의했다. 그러나
경찰은 애매한 이유를 반복하기만 하며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경찰의 반응에 분노한 투쟁단은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경찰의 저지를 뿌리치고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시도해 몇 차례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외무성 정문까지
접근할 수는 없었지만, 외무성 맞은편의 농림수산성 건물 앞에서
'FTA 반대', '협상내용공개'등을 외치며 연좌농성과 항의행동을
진행했다. 10시 경 공동투쟁단은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일한 FTA
협상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식, 한국식의 구호와
발언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한국원정투쟁단과 동행한 노동가수
류금신씨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항의행동과 연좌농성은 평소
일본의 노동조합이 진행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외무성 바로 앞까지 갈수는 없었지만, 오전 내내
연좌농성과 항의행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성과였다.
이날 오후, 민주노총, 한국노총 대표자는 렌고(聯合- 일본 최대
노총)와 전노련(공산당계열 노총)을 방문해, 일한 FTA에
대응하는데 함께할 것을 호소했다. 렌고는 FTA에 의해 양국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과 교섭 과정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전노련은 현시점에서
조직적으로 협력을 약속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협력할 것이라
답했다. 이후, 대표단은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한
FTA반대투쟁의 의의를 호소했다.
오전 일정을 끝낸 공동투쟁단은, 국토교통성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철해고자 및 가족의 연좌농성에 참여했다. 한국 투쟁단은
18년이라는 장기간동안 원직복직 투쟁을 끈질기게 계속하고 있는
국철해고자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국철해고노동자들도
일한FTA반대투쟁에 연대의 뜻을 표명했다. 저녁에는 유라쿠쵸
마리온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선뜻
유인물을 받으려하지 않아서, 한국의 투쟁단이 곤란해했다.
둘째 날, 공동투쟁단의 인원은 대략 400명으로 늘어났고, 아침
일찍 외무성 항의서한을 들고 외무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외무성측은 사전의 약속을 번복하며 항의서한을 접수하기
곤란하는 둥 시종일관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다. 투쟁단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바리케이트에서 횡단보도를 막아선 기동대의
제지를 뿌리치고 외무성으로 달려가면서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몇 차례 계속된 충돌의 과정에서 투쟁단 2인이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부당을 입고 병원으로 갔다. 공동투쟁단
대표자는 외무성내에서 경제연계실, 북동아시아 담당자를 만나
한국정부 협상단과의 면담, 교섭내용 공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시간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외무성측은 면회 요청은
전달했으나 일정상 불가능하고, 내용 공개에 대해서는
외교교섭이라는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경찰의 부당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외무성 앞 항의행동을 마치고
인도를 이용해 국회로 향하던 [전일본운수노조연대] 조합원이
부당하게 체포되었다. 수십 년 동안 관청 주변에서 벌어진
충돌의 실태를 미봉하려고 하는 마루노우치서의 보복이다.
부당한 체포이다. 이에 대해 즉석에서 마루노우치서 앞에서
항의행동을 진행했다.
투쟁단은 국회의원 회관 앞에 도착해 항의행동을 진행했다.
민주당, 사민당 의원들의 발언도 있었다. 이후 투쟁단은 일한
FTA협상에 즈음하여 ‘무노동무임금 원칙 준수’, ‘퇴직금산출
유연화’, ‘한국의 노동관행/제도의 파괴’를 제언하고 있는
일본경단련 앞 항의행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경찰은
도로를 봉쇄해 투쟁단을 일본 경단련의 건물에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이에 투쟁단은 건물 맞은편 인도에 연좌하고 건물을 향해
고함을 외치는 한국 스타일의 항의를 진행했다. 참가한 일본측
투쟁단은 평소와 다른 [한류]의 항의 행동에 신선한
「즐거움」을 느꼈다. 평소 같은 소수 인원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저녁에는 시부야의 미야시타 공원에서 5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한 노동자 공동집회 및 행진을 진행했다. 전노협의
후지사키의장, 한국원정투쟁단 조준호단장, 전통일노조의 도리이
서기장등의 발언이 있었고, 당일 벌어진 부당한 체포에 대한
항의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 밖의 발언, 류금신씨의 노래 등으로
집회는 1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집회를 마치고 한국원정투쟁단,
일본의 시민사회단체, 일본의 노동조합의 순서로 행진을
진행했다. 선두에 선 한국투쟁단은 힘찬 구호로 주위의 주목을
끌었다. 한국식 구호의 효과인지, [한류] 붐의 덕분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유인물을 받아 갔다. 최근 시민단체가 벌이는
축제적인 [퍼레이드]와는 분명히 다른, 그야말로 노동조합인
듯한 무리의 불의에 대한 소박한 분노의 표출, 구호, 붉은
머리띠와 깃발이 나부끼는 [데모]는 분명 휴일전의 시부야의
밤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위대가 발산하는 확고한 신념,
강한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분 좋은
데모였다. 이날 밤 투쟁단의 숙소에서는 다음날의 행동을
둘러싸고 늦은 시간까지 격렬한 논의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아침, 휴일이므로 일반직원은 출근하지 않지만 교섭은
계속되었다. 경찰의 엄중한 경비 속에 농림수산성 앞 연좌시위가
열렸다.
마지막 날의 아침이 되었다. 휴일이므로 일반직원은 등청 하지
않지만 , 교섭은 행해진다. 시간 대로에 집합한 한국 노총의
조합원과 일본측의 투쟁단에 의해 , 경찰에 의한 엄중한 경비안
, 농수성전에 들어앉은 항의 집회가 열렸다. 전 날의 부당
체포에 항의하는 마루노우치서앞 시위되 진행되었다.
오후에는, 분쿄구민센터에서 ‘일한FTA 저지 전략워크샵’을
진행했고, ‘국제 쌀의해 심포지엄’, 에비스 구민회관에서 열린
‘못가진 자들의 모임’의 연대행동, 신바시SL 앞에서의
국철투쟁단 선전전에 각가 참가하여 일한 FTA에 관한 발언을
했다.
집회가 모두 끝나고 분쿄구민센터에서 한국투쟁단 환송회를
진행했다. 이 환송회에는 사정상 항의행동에는 참가할 수 없었던
반세계화 활동가들이 다수 참가했다. 감동적인 환송회였다. 한국
측 대표는 일본의 투쟁 지원 및 연대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고, 일본측 대표는 한국 자의 힘찬 행동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점에 감사했다. 환송회장 여기 저기서 한국, 일본
참가자들은 서로 격려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사흘간 동경에서 함께 투쟁하며 싹튼 일한
노동자의 연대감을 표현할 수 없다. 환송회가 끝나갈 무렵,
한국의 한 노동자가 마이크를 잡고 ‘여기 있는 모든이는 우리의
동지다!’라고 외치자 마자, 한국 투쟁단 전원이 ‘동지!
동지!’를 외치며 일본 실행위원들에게 달려왔다. 투쟁하는
노동자 사이에 말은 필요 없다. 여기저기서 꼭 얼싸안고 손을
잡는 일한 노동자들. 여기에는 국경도, 언어의 장벽도 없었다.
누구나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단순히
구호로서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