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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번 : [펌] 사회진보연대 10월 아셈투쟁 평가 초안
글쓴이: 국민행동 등록: 2000-11-01 11:36:27 조회: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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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아셈투쟁, 일보전진 그러나 이보후퇴 <사회진보연대 평가초안>

1. 기억해야 할 것들 

지난 8월 24일 민주노총 집행간부들과 [신자유주의반대·민중생존권쟁취
민중대회위원회], [투자협정·WTO반대 국민행동]의 핵심 활동가들은 간담회 형식의
연석회의를 가졌다. 10월 20일로 예정된 아셈 회의와  저항 투쟁을 어떻게 공동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논의의 주제였다. 논의 핵심쟁점은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되었던 [아셈2000 민간단체 포럼]이 10월 20일경 [아셈2000
'시민행동'의 날]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 시민행동을 준비 기획하는 단위가
바로 민주노총이었던 상황에서 기인했다. 즉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의 핵심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민간포럼의 시민행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아셈이 상징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대와 저항투쟁을 자신의 주요한 사업 과제로 설정하고 있었지만, 민간 포럼의 10월
20일 시민행동과 다른 별도의 민중연대집회를  상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아셈에
대한 '비판적 개입'인가 아니면 '전면적 투쟁과 비판'인가라는
현실인식/투쟁수위-방식을 둘러싼 '아셈민간포럼'과 '민중대회위원회
및 국민행동'간의 상이한 입장차이는  민주노총을 경계로 하여 매우 불분명한
형태로 봉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판단과 인식 차이를
조율하고, 사업 계획을 조정하기 위한 것이 바로 8월 24일 간담회였던 것이다.
여기서 모아진 결론은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이 공동의 이름으로 아셈민간포럼에
'10월 20일 세 연대기구의 공동집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결론은 세 연대기구에 모두 참여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상황을 고려하여
민주노총의 의견을 존중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이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의
의결단위에서 승인되고, 민간포럼에 대한 공동 제안이 이루어지고, 몇차례의
우여곡절과 조정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아셈2000 신자유주의반대
서울행동의날 준비위원회'인 것이다. 그리고 서울행동 준비위원회는 민간포럼과
민중대위원회, 국민행동 각 3인씩으로 구성되는 기획단을 의견 조정단위로
구성하였고, 그  산하에 실무소위를 두어 구체적 업무와 사업계획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아셈민간포럼의 핵심 사업은 13개 분과 회의와 전체 회의로 이루어지는 18~19일의
민간포럼 행사이고, 이것은 민중대회위원회, 국민행동과는 무관한 민간포럼의
독자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민간포럼 내부적으로는 인권분과의 절대 다수인 13개
인권단체가 정부지원금에 대한 절대적 의존 반대와 민간포럼 진행과정에 대해
문제제기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추진기구인 아셈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비판적 참여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비판하면서 아셈민간포럼에서 공식 탈퇴를 하였다. 이러한 민간포럼의 상황과는
별개로 10월 20일 서울행동을 준비하고 대중을 교육, 선전하는 독자적 사업계획이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에게 과제로서 요구되었다. 더군다나 아셈민간포럼의
사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강한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아셈에 대한
민중진영의 공통된 인식을 확립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공유하는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그래서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공동의 투쟁기획단을 꾸리고, 이
단위에서 공동으로 아셈투쟁에 대한 계획과 실천사업을 논의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말뿐인 행동으로서의 '시민행동'이 아닌
'민중행동'이라고 규정하였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아셈 투쟁이 18~19일의 아셈민간포럼으로 대표되거나 10월 20일
2시의 집회 하나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투쟁을 준비하는 것은 곧 대중을
조직하고 교육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며, 다양한 실천사업들을 규모와 수위를 조절하여
배치하는 것이라는 것이 민중행동의 문제의식이었다. 세 연대기구 공동으로 진행하는
10월 20일 오후의 서울행동과 이를 사전에 목적의식적 실천사업으로 배치하고
준비하는 두 연대기구의 민중행동은 이러한 점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조직적 논의와 의결, 조정 과정을 거치는 공식적인 과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행동의 맥락과 기조에서 아셈 교육자료집(국민행동 자료집과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을 발행하였고, 아셈 투쟁문화제 '씨애틀, 프라하 그리고
서울'을 10월 8일 개최하고 참석하였다. 또한 민중행동의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대중화시키기 위해 서울행동의 날 공식 포스터와 별도로 아셈 대자보를 두 연대기구
공동의 명의로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또 서울행동 이전에 민중행동의 의의를 알려내고
투쟁의 결의를 모으기 위해 민중행동 문화제를 서울행동 전날에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서울행동의 날 오전, 아셈 정상회의 개막에 즈음하여 한국 민중들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의 결의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한 투쟁을
조직하기로 한 것이다. 이 투쟁들은 어느 한 부문 과 몇몇 단체의 투쟁이 아니라
민중행동을 결의한 우리 모두의 투쟁 과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난 과정에 대해 장황하게 서술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투쟁을 평가하고
한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중요한 준거점이라는 인식때문이다. 무엇을 결의하고
합의하였는지를 부정할 때 또는 망각할 때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투쟁의 경험이 성과적으로 축적되고 일보전진을 위한 기반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아셈투쟁의 과정에 대한 개요

가) 10월 19일 이전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셈 투쟁의 준비는 실질적으로는 9월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셈 투쟁이 한 번의 집회투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도 아셈과 투쟁의 의미에 대해
교육하고 선전, 조직하는 사업을 배치해야 하며, 집회 투쟁 또한 소규모로 연속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아셈투쟁을 투쟁사업,
정치사업, 교육선전사업, 문화사업, 기타사업 등으로 나누어서 사업을 계획하고
배치하기로 하였다. 

투쟁사업과 관련해서는 10월 19일 전야제와 20일 오전투쟁과 서울행동의 날이 가장 큰
사업이었지만 소규모 투쟁으로 16일 오므론 집회와 18일과 19일의 경총 규탄 집회,
파견철폐공대위 집회 등에 결합하여 아셈 투쟁의 의의를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외에도 아셈공식회의의 하나였던 세계지식포럼(이랜드 협찬)에 대한
규탄과 항의투쟁, 시티은행과 같은 초국적자본이나 외자기업에 대한 상징적 투쟁을
추진하였지만 주객관적 사정으로 인해 철회하거나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평가의 한 지점이 되어야 한다. 아셈 투쟁이 어느날 활화산처럼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면, 더군다나 아셈반대라는 정치적 목표를 명확히 하는 투쟁이라면 사전에
투쟁을 조직하고 확산시켜가는 사업들이 목적의식적으로 배치되고 조직되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 원인을 진단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정치사업과 관련해서는 시민단체의 아셈민간포럼과는 다른 축으로 민중행동의 투쟁과
정치적 방향을 알려낼 수 있는 사업으로 국제토론회를 추진하였다. 아셈에 대한
저항을 시민운동이 주도하는 것으로 비쳐지는 현실과 서울을 주시하고 있는 국제적
운동세력들에게 한국 민중운동의 태도와 입장을 정식화해주는 정치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한계 또한 존재하였는데,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
대부분이 아셈민간포럼에 의해 초청받은 인사라는 점과 이와 별도로 국제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재정적, 시간적, 물리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취한 태도는 아셈민간포럼에 온 외국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민중행동의
실천계획을 알려내고, 민중행동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소규모의
국제토론회를 아셈민간포럼 일정과 겹치지 않게 잡아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과 사회진보연대가 주최하는 국제포럼이 전야제가 있는 장소에서
대여섯명의 외국 활동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간략하게 진행된 것이다. 다행히
200여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하여 행사 자체는 외형적으로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국제포럼이 정치사업의 한 맥락에서 배치되었고, 포럼에서 다룰려고 한 내용
또한 한두 단체의 간담회가 아니라 민중행동이 시민운동과 별도로 구성되고 다양한
실천을 전개하는 정치적 의미와 투쟁의 방향을 알리고 논의하는 것라고 할 때 우리는
그 기준에 미달하였다고 밖에 평가할 수 없다. 정치사업을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벤트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 원인을 진단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교육선전사업과 관련해서는 국민행동에서 발행한 아셈투쟁 자료집이 유효적절하게
제출되었고, 활용 또한 대중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국민행동 자료집은
주로 아셈과 국제기구에 대한 분석과 비판, 국제적 민중 투쟁의 흐름을 소개하고
反신자유주의 反세계화 투쟁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반면
민중대회위원회의 자료집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국내 민중들의 현실을 연관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노동 농민 빈민 실업과 교육 등의 현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어떻게
민중을 파괴하고 피폐화시키고 있는가를 선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점에서
민중대회위원회의 자료집은 국민행동 자료집의 내용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이 발행된 시점과 배포를 위한 물리적 시간의
촉박함으로 인해 소수의 분량만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고 파일을 통한 지역과 부문에서
주체적으로 활용되기를 바랬다. 비교적 아셈투쟁의 다른 측면에 비해 교육선전사업이
외형적으로는 성과있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러한 자료집이 대중 교육과
조직화의 매개체로 적극적이고 효율성있게 사용되었는가는 별도로 확인 평가
점검되어야 할 측면이다.

선전사업과 관련한 또다른 한 측면에서 서울행동 포스터와 민중행동 대자보가
평가되어야 한다. 이것은 포스터와 대자보의 내용적 형상화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정치적 판단과 입장에 대한 평가의 문제이다. 서울행동 포스터를 개별 조직에서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 아셈민간포럼에서는 포스터가 서울행동과는 다른 성격이
가미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다. 서울행동 포스터를 개별 단체에서 자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사전 통제가 행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행동에서 취한
태도는 민중행동의 독자적인 내용을 집약하는 선전대자보를 제작하여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을 집행하고 단위별로 배포하였다. 그러나 민중행동의
독자적 대자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현실적 이유는 민주노총의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대자보의 필요성과 의미, 배포과정은 민주노총과 공유되지
못했다. 공유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는 아셈투쟁을 선전하는
민주노총의 자체 포스터에 10월 20일 서울행동 장소로 '건국대'가
인쇄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민주노총에서는 인쇄 과정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지워서
내려보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대는 아셈민간포럼이 진행되는 장소이며,
민중행동이나 서울행동과는 전혀 무관한 장소이다. 민주노총의 고민과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었는지는 보여주는 하나의 에피소드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화사업과 관련해서는 10월 8일 국민행동의 문화제와 10월 19일의 민중행동 전야제가
배치되었다. 참석자의 숫자나 관객들의 반응 그리고 문화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였던
정치적 의미의 형상화하는 점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진행된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민중행동은 예측되는 경찰측의 방해를 방지하고 10월 20일 서울행동
집회를 강력하게 전개하기 위해 아셈회의장 주변 몇군데에 미리 집회신고를 내기로
하였다. 9월 8일과 9일 사회진보연대와 공공의료강화를 위한 연대회의 명의로 집회
신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중복신고를 이유로 집회 금지를 통고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언론의 보도를 통해 경찰이 불법부당하게 아셈행사장 주변의 기업과
관변단체를 강요하여 집회 신고를 내도록 한 것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문제는 집회신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아셈투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경찰의 불법 행위가 폭로되면서 우리에게 유리한 정세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민중행동은 이러한 쟁점을 사회적으로 확산하면서 아셈투쟁의
선제 공격적 의미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신고 주최단체의 개별적 문제로 제한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민중행동의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9월 22일 국민행동 아셈자료집 발간 → 10월 6일 아셈 집회금지와 관련하여
강남경찰서 항의방문 → 10월 8일 국민행동 문화제 → 10월 9일 민중대회위원회
자료집 발간 → 10월 12일 민주노총 '한일 한미투자협정' 토론회 → 10월
16일 사무금융노련 주최의 한국오므론 관련 집회 → 10월 17일 민중행동 기자간담회
→ 10월 17일 서울경찰청장 강남경찰서장, 직권남용과 집회 방해로 고발 → 10월 18일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노동법 개악에 대해 경총 항의 집회 → 10월 19일 이랜드노조,
경총 항의집회 / 학생들 아셈관련 선전전과 가두행진 / 민중행동 국제포럼 / 민중행동
문화제   

나) 10월 19일~20일  

19일 전야제와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혼선이 존재하였다. 애초 민주노총이 상경투쟁의
핵심을 20일~21일로 잡았을 때는 19일 전야제에 노동자대오가 결합하기 힘들다는 판단
속에서 학생과 사회단체 중심으로 민중행동 전야제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그
수가 많지 않고 노동자대오가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더라도 20일 오전투쟁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민중행동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19일 상경으로 방침을 바꾼 이후에도 상경 대오의 규모와 전야제에 결합하는 정도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오전 투쟁에 대한 민주노총의 결합 수위가 전혀 예측되지
못했다. 이것은 투쟁의 주체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민중행동의 맥락에서 전술을
배치하고 운용하는 것인지, 민중행동과 별개로 민주노총이 투쟁 계획을 잡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사후적으로 평가한다면 상당한 혼란과 동요가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숭실대
봉쇄 여부(20일 오전투쟁에 대한)에 대한 경찰측의 움직임도 정확하게 분석되지
못하였다. 

전술운용의 핵심이 경찰측의 대응 방향과 주체의 준비 정도에 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인
판단하에 전술운용의 기조에 근거하여 몇가지의 전술을 결정하고, 현장의 상황 변화에
맞추어 이를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19~20 투쟁의 전술 지도부는
많은 한계를 드러내었다. 전술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와 수립된 전술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전술운용의 주체가 누구였는가? 과연 민중행동이 아셈투쟁의 중심
주체였는가 아니면 민중행동이 민주노총 투쟁에 대한 지지 지원자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아셈 투쟁전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들이 평가 과정에서 던져져야
한다. 그 질문과 대답에서 이번 투쟁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20일 투쟁의 흐름은 크게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9일 전야제(민중행동) ―
20일 8시 아셈저지 투쟁(민중행동) ― 20일 10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아셈
진격투쟁(민중행동) ― 20일 오후 2시 서울행동의 날이 그것이다.

전야제의 참석 규모는 정확하게 점검되거나 예측되지 못했다. 특히 노동자대오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학생들의 경우는 비교적 예측이 가능했고 또 예측과 현실치가
근접하였다. 이것은 참석 규모에 대한 호사가적 관심이 아니다. 이것은 20일 오전
투쟁에 대한 동력의 문제이며, 투쟁 주체의 규모와 가능한 전술방식에 대한 고민과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술 지도부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20일 오전 8시의 아셈 저지투쟁의 수위도 이와 연동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는
8시 투쟁과 관련하여 몇가지 가능성과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학생대오를
중심으로 하고 노동자대오는 선봉대 중심으로 결합하여 아셈정상들이 숙식하는 특정
호텔을 오전에 봉쇄한다는 것, 아셈 정상들이 회의장으로 참석하러 가는 도로 중
강남의 요충지에서 기습시위를 벌이는 것 등에 대해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아셈 저지
투쟁의 기조를 고수할 것, 투쟁의 규모를 판단하여 현실적으로 가능한 전술이어야 할
것, 학생들만의 투쟁으로 비추어져서는 안될 것 등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19일 저녁 현실적으로 노동자대오가 8시 투쟁에 일부라도 결합하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투쟁의 기조를 전환하였다. 즉 1천여명의
학생 대오를 단일하게 형성하여 진격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학생들을 노동자와
분리시켜 고립시킬 가능성이 많으며, 또한 1천여명의 학생대오로는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래서 8시 투쟁과 관련해서는 학생 단위를
소규모로 재편하여 아셈 회의장 주변에서 기습시위를 연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최종 방침을 결정한 것이다. (일부 신문에서도 민주노총 관계자의 발언으로
소개되었고, 공식회의상에서 민주노총 지도부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 것처럼 20일 오전
투쟁은 민주노총과 무관한 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니었다. 오전 투쟁이 학생들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민주노총이 참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정이 핵심적 이유였다.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8시 투쟁은 민주노총과 무관한 학생투쟁이고, 10시는
민주노총 투쟁이라고 하는 것은 민중연대운동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발언에 다름아닌
것이다)
              
10시 투쟁과 관련한 전술적 고민은 뱅뱅사거리 주변에서 어떻게 집회공간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집회 금지를 통고한 상황에서 경찰은 최대한의 강도로 집회장
주변을 봉쇄할 것이고, 또한 집회 대오가 형성되더라도 행진은 가능하지 않고
상당수가 연행될 것이라는 예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예상에 근거할 때 강력한 물리적
대치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높은 결의와 주체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고 올바른 것이냐?에 전술 고민이 집중되었다. 그래서 결정된
방침은 선봉대를 중심으로 집회 공간을 기습적으로 확보하고 집회 이후 전원
연좌투쟁을 전개한다는 공격적 방어전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적 판단이 오판이었다는 것이 20일 10시 드러났다. 집회 공간은
봉쇄되지 않았고, 경찰은 집회대오를 연행하지도 않았고, 강남역까지의 행진도 허용한
것이다. 약 3000여명의 집회 대오가 형성되었고, 일정한 물리적 충돌이 있었지만
강남역까지 행진을 하였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하였다. 강남역까지 행진한 다음
어떠한 전술과 행동방침을 채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예상했던 전술방향과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었지만 강남역 이후에 대한 현장에서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지도부는 집회의 종결과 2시 서울행동의 날 참석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의 근거에는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강박관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뱅뱅사거리와 강남역에서의 대치를 어떻게 확대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판단이 아니라 서울행동의 날에 강남역 대오가 결합해야 한다는 것, 강남역 대치가
장기화되거나 폭발적으로 전개되었을 때 서울행동의 날 행사가 훼손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강박관념이 대치의 종결을 신속하게 결정한 배경인 것이다. 결국 이
판단은 서울행동의 날과 아셈 투쟁의 총론적 기조가 반영되었던 것이며, 단순히
강남역 대치에 대한 현실적 판단의 차이로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 

서울행동의 날은 세 연대기구의 조정과정을 통해 결정된 것이다. 즉 대회는 문화행사
중심으로 진행하며 3.2km를 힘있게 행진하고 마무리 집회를 종합경기장에서 한다는
것은 세 연대기구간에 조정 결정된 것이다. 여기서 민중행동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할
지점은 장소 선정에서 참석자들의 투쟁의지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이벤트로 국한되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공간으로 결정나는 '과정'에 대한
것이 하나이며, 두번째는 행진과 마무리 집회에서 민중행동의 구체적인 개입 방안이
제출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올림픽공원에서 집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정권과의 긴장감있는 대치와 대중적 투쟁을
가로막는 구조적 제약요인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행동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구조적 제약을 감수하면서 개입전술을 채택하든가
아니면 대회 자체를 보이코트하고 별도의 대중행동을 조직하는가의 양자선택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민중행동은 전자를 선택하였지만 개입 전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민중행동의 계획이 없었던 것이다. 계획이 부재한
상황에서 마무리 집회에서의 일정한 대치와 공방은 결국 에피소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평가

민중행동의 아셈 투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공유했었던 아셈투쟁에 대한
민중행동의 원칙과 기조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전제이다. 서울행동의 날을 3개의
연대기구가 공동으로 개최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3자연대의 틀이 담아낼 수 없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투쟁의 민중적
원칙'의 고수가 민중행동의 원칙이고 기조였다. 이것에 대한 공유가 서울행동과
독자적인 민중행동의 틀을 구성하고 일련의 투쟁을 추진하게 한 기본동인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아셈민간포럼에서 탈퇴하여 자체의 독자적 조직틀을 구성하고
아셈투쟁을 고민한 '자본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인권포럼'에 속한
인권단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정치조직적 근거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셈은 시민사회의 의견을 조금이나마 수용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APEC과  IMF, WTO와
같은 국제기구들과 다르다는 것이 아셈민간포럼측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각에 반대하였다. 자유무역지대화,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방안,
투자자유화를 위한 협력 강화의 내용을 논의 협의하는 아셈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담지체일 수밖에 없으며, 아셈에 대한 태도는 '비판적 개입'이 아닌
'전면적 비판과 반대'이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시각이었다. 물론
시각 차이가 모든 공동행동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동일하여 서울행동의 날 공동개최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셈민간포럼과 국민행동·민중대회위원회 간에 상이한
시각과 태도가 존재하지만 민주노총의 처지와 입장을 고려하고 존중하여 공동개최가
한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민중행동에 입각한
계획과 행동이 1차적이고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민중행동 참여는 하나의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중요한
원칙이자 행동의 준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무의미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연대의 파괴와 해체를 낳을 뿐이다. 

평가의 핵심을 몇 개의 명제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라는 강한
정치투쟁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실천적으로 참여하고 그 공감대를
확산시켰다는 점은 민중운동의 소중한 성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추상적인 것은 가장 구체적인 것이다. 투쟁의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생활적 생존권적
요구라는 구체적인 요구와 목표에 기반하여, 이를 정치적으로 집약하고
추상화(?)시켜가는 과정이 투쟁이 발전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80년대 군사독재
타도라는 목표는 민중이 생활과 현장에서 느끼는 삶의 모순과 피폐함, 고통과
어려움을 집약하여 투쟁의 목표로 설정한 것이다. 물론 그 추상이 구체에 기반하지
못할 때, 정치적 목표가 대중의 구체적 삶과 현장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할 때 그것은
관념적 목표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은 민중진영의
요구와 목표를 집약하고 있는 가장 정치적인 투쟁이다. 노동자의 구조조정에 대한
불만, 농업 파탄에 대한 저항, 빈민탄압과 노점단속으로 인한 생존의 위기, 공공성의
파괴와 기간산업의 사유화와 해외매각에 대한 반대, 실업과 불안정노동의 확대재생산
등 구체적으로 부딪히는 민중의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규정하고 투쟁을 집중한 것이다. 이것이 이번 투쟁의 가장 소중한
측면이다. 여러가지 한계가 있었지만 이러한 성과적 측면을 무시한다면 올바른 평가일
수 없다. 물론 이러한 투쟁의 성격이 대중 속에서 선전, 교육되고 충분히
공유되었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많이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투쟁의 성격을 규정하고 대중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막역하고 모호한
추상적 개념으로 '신자유주의 반대, 세계화 반대'를 사고하는 형식주의자들
또한 존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가 우리 운동의 정치적 강령이 아니라 정치적
수사와 레토릭으로 사고하는 경향도 상당한 것이다. 이것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의 현실적 실천적 함의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고 불안정화시키는 구조조정이 김대중정권만이 아니라 IMF와
WTO로 대표되는 초국적자본의 국제기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식이 이제 노동자
대중 사이에서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농민들의 경우 우르과이라운드에서 드러났던
농산믈 개방과 농업파괴적 정책에 대한 격렬한 대중투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빈민들의 경우도 올림픽과 같은 국제행사 개최가 빈민탄압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아왔고, 투쟁의 경험 또한 가지고 있다. 즉 IMF, WTO, APEC, ASEM과
같은 초국적자본의 국제기구와 행사가 바로 한국 민중들에 대한 생존권의 파괴,
구조조정의 강행, 민주주의의 후퇴, 경제종속의 심화를 의미한다는 점이 서서히
의식되고, 서서히 저항투쟁으로 조직되어 왔었다. 이번 아셈투쟁은 이러한 민중의
흐름을 전면화시키면서 투쟁의 분명한 목표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아셈
반대'를 내걸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투쟁을 소수의 대오가 아닌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다는 점에 그 투쟁의 의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상경투쟁이 처음에는 20일, 21일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가 '19일과
20일 집중'으로 전환한 것이 가지는 의미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나) 아셈민간포럼 참여와 내용적 기조를 둘러싸고 민중진영의 공통 인식과 공동의
행보가 부재하였다. 또한 서울행동과 별도로 민중행동을 조직한다는 것의 정치적
함의와 책임성에 대한 자각이 미흡하였다.

아셈민간포럼은 약 2년전부터 조직위원회가 꾸려져서 준비되어왔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었으며, 민중운동진영에서도 몇몇 주요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아셈이 임박해지고 투쟁에 대한 긴장감이 형성되면서
아셈민간포럼의 내용과 사업기조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주요
쟁점은 정부지원금에 대한 문제, 아셈에 대한 태도의 문제, 투쟁의 수위 문제였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은 주로 아셈민간포럼 내부의 개별
단체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즈음 민중대회위원회에서는 아셈민간포럼이 한국
민중진영의 아셈투쟁을 책임질 수도, 대표할 수도 없다는 판단을 하고 독자적인
실천과 사업계획을 고민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힘있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아셈민간포럼에 참여하고 있는 민중진영의 공통된 입장과 행동 방침이 필요하였다.
더욱이 민주노총이 아셈민간포럼에 참여하고 있고, 아셈민간포럼에서 주최하는
'시민행동의 날' 집회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입장 정리와
공통의 행보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셈민간포럼에 참여하고 있던 양대
민중운동진영 중 전농은 공식적으로 아셈민간포럼을 탈퇴하였고, 민주노총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민중진영과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던 아셈민간포럼 인권분과의
인권단체들은 대다수가 탈퇴를 하였다. 아셈투쟁을 둘러싸고, 아셈민간포럼을
한축으로 하고, 또다른 축으로는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물론 국민행동 단체들 중
상당수는 아셈민간포럼과 이중멤버쉽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셈민간포럼을 탈퇴한
인권단체(자·세·포)들이 존재하였다. 이 양 축 사이에는 아셈에 대한 시각과 태도,
투쟁의 방향을 둘러싸고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한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단순화되었다면 아셈민간포럼의 사업과 민중진영의 사업이 서로 독자적으로
진행되면서 필요할 경우 공동사업을 논의하고 추진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이렇게 전개되지 못하고 복합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는 민주노총이 3자
연대기구에 모두 참여하고 있었으며, 아셈민간포럼의 대중행동을 책임지는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현실이다. 민주노총이 3자 연대기구에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집어 생각하면 아셈투쟁과 반(反)신자유주의 투쟁에 대해 민주노총이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서로 다른 경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민주노총 내부가
단일한 입장으로 정립되지 못하고 상이한 경향들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실은 결코 발전이나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여하튼 결과는 상호충돌하는 두
경향들이 상호 분리 정립되고, 이것을 전제한 위에서 공동행동을 추진한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이라는 민중운동의 거대 권력에 의해 분리 정립이 저지되고 미봉된 것이다.
이것은 아셈민간포럼에 대한 민중진영의 입장과 태도의 정립 문제이자 아셈투쟁의
기조와 방향을 정립하는 문제인 것이다. 서울행동의 날을 공동으로 치루고 세
연대기구의 책임자급에서 논의와 사업계획을 조율하는 실용적 처리로 미봉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것은 민중진영 아셈투쟁의 원칙과 기조를 교란시키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민중행동을 별도로 구성하고 민중진영의 투쟁계획을 이 단위에서 조직하고
실천하자는 것은 실용적으로 봉합된 서울행동에 대한 민중적 개입의 필요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민중행동에 대한 공감대와 원칙의 공유는
이미 이전에 아셈민간포럼에 대한 태도와 서울행동 문제에서 동요하면서 혼란을
내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 민중행동의 원칙을 분명하게 공유하고, 이 원칙에 근거하여 협의가 진행되고,
각종 사업과 투쟁들이 배치되고 추진되지 못하였다. 

민중행동은 단일한 블럭으로써 아셈민간포럼과 의견을 조율하고 자신의 계획과 기조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두가지
문제에서 민중행동은 실패하고 무능하였다. 아셈민간포럼은 10월 10일 서울행동
기자회견을 3자 연대기구가 공동으로 개최할 것을 합의한 상태에서 10월 9일
아셈민간포럼의 독자적 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18~19일의
아셈민간포럼과 20일 서울행동의 날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민중행동은 이에 대해
항의하지 못했다. 아셈민간포럼의 기자회견은 10월 10일 서울행동 기자회견을 할
필요성과 의미를 박탈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실 결과에 추수하면서 민중행동은
별도의 기자간담회를 10월 17일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사회적
이니셔티브를 아셈민간포럼에 선취당한 상태에서 민중행동 기자간담회의 주요 내용은
서울행동의 날 이전 프로그램(19일 전야제 등)과 관련한 것이 주요 내용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또한 민중행동의 주체적 상황으로 치밀하고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준비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둘째 서울행동의 날 장소와 관련된 것으로, 올림픽공원이 경찰측과 협의된 상태에서
아셈민간포럼은 이에 동의하였고, 민중대회위원회와 국민행동은 내부에 상당한 이견이
존재하였다. 그래서 3자간의 최종 합의 결과는 민중대회위원회 대표자회의가 열리는
17일 오전에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셈민간포럼은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행동의 날 장소로 올림픽공원으로 선포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아셈민간포럼의 기자회견에 민주노총이 참석한 것이다. 결국 17일 민중대회위원회
대표자회의에게 부여된 선택의 폭은 이러한 발표에 굴종하든가, 아니면 알아서 하라는
것인 것이었다. 민중행동이라는 공동실천 단위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하였고,
와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논의 내용을 첨언하면, 민중행동 전술단위에서는 애초에 올림픽공원으로
경찰과 협의가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보고를 받고 이에 대해 두가지 의견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하나는 올림픽공원 협상안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반대'하고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원칙에 근거하여 경호구역 B구역 내의
도로를 요구하는 재협상을 진행할 것, 둘째 이러한 요구가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경찰과의 교섭은 결렬시키고, 교섭과 무관하게 우리 투쟁의 의의를 살릴 수
있는 장소를 독자적으로 판단 결정하고 강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을
교섭단과 지도부에 전달하였다. 하지만 이런 과정과 의견은 철저하게 상층 논의에서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3자 연대기구간의 협의과정에서도 민중행동의 원칙이 분명하지
못했고, 그나마 존재했던 원칙도 동요하고 교란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이전부터
아셈투쟁을 아래에서부터 조직하고 추진하는 사업계획과 역할도 미약한 상태에서
민중행동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애초부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또 동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 민중행동의 아셈투쟁 지도부가 사실상 부재하였으며, 이에 대한 책임의식이
미흡하였다. 전술과 각종 투쟁과정에서의 혼선과 동요, 불안은 결국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민중행동의 10월 아셈투쟁을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투쟁 지도부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민중행동의 공동투쟁기획단을 구성하기로 한 '정치적' 결정을
있었으나 이 단위를 중심으로 투쟁을 책임지고 이끌어가려는 계획은 부재하거나
대단히 미흡하였던 것이다. 투쟁은 특정 행사의 기획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민중행동은 몇몇 행사에 대해 회의를 하고, 의견를 교류하고, 개인과 단위로 역할
분담을 하였지만 투쟁 지도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지도부의 역할은
사업계획과 투쟁방향에 대해 논의를 조직하고 토론과 의견수렴에 근거하여 방침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며,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결정과 집행, 평가가 없다면 그것은 난상토론의
장일 수 있을지언정 책임있는 투쟁 지도부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19일 이전의 여러 투쟁과 사업에 대한 결정과 책임성, 19일 전야제에 대한 판단과
결정 그리고 이것의 공유, 20일 오전 투쟁의 기조와 행동방침에 대한 결정,
서울행동의 날에 대한 민중행동의 개입 계획 수립과 결정과 집행, 그리고
아셈민간포럼에 대한 협의과정에서 일관된 방침의 수립과 집행, 이러한 것들이 바로
(민주노총이나 개별단체의 개별적 몫이 아니라) 민중행동 투쟁지도부가 책임있게
결정하고 집행, 점검해야 할 주요 지점들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 모습은 이에
미달하였다.  

마) 이번 10월 아셈투쟁으로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이 일단락된
것이 아니라, 이제 출발점에 서있다는 점이 공유되었다. 그러기에 국제적인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대한 연대의 고민과 '3차 아셈 이후'에 대한 문제가
민중운동에게 제기되고 있다.  

이번 10월 아셈투쟁은 한국의 민중운동이 국제적 민중운동 흐름에 대해 시야를 확장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며, 씨애틀과 프라하
투쟁이 먼 나라의 어렴풋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민중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조조정 반대가 아셈과 IMF, WTO에 대한 반대와
동전의 양면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한국의 민중운동에서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셈 투쟁 이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4차 아셈에 대한 고민과 아시아와 유럽, 한국의 민중운동이 보다
전투적이고 긴밀하게 연대할 수 있는 정치적 내용과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아셈민간포럼과 한국 시민운동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연대의 틀에 대한 인식과 시각 정립의 필요성과 만나게 된다. 3차 아셈, 10월
투쟁의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오늘의 문제라는 관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의 폭발성을 가진 쟁점이 '사회포럼의 설치와 NGO 의견을
수렴'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아셈 관계자의 발언이다. 이것은 개인의 발언으로
폄하하기 이전에, 아셈에 대한 시민운동의 시각과 민중운동의 시각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갈등할 수 있는 쟁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셈에 대한 '비판적 개입' 전략의 핵심은 사회포럼을 아셈공식회의에
설치하여, 이것을 매개로 시민사회와 NGO의 의견이 정상간의 공식회의에 반영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셈에 대한 '전면 비판과 반대'의 입장은
이러한 사회포럼에 대해 노사정위원회의 국제판에 다름아닌 것, 국제적
코포라티즘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아셈투쟁이 주는 교훈의 하나가 국제적
연대운동에 대한 한국 민중운동의 입장과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연대운동에 대한 수동적 동참이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4. 상설공투체와 관련한 첨언 

가) 아셈투쟁은 일회성 투쟁이 아니라 민중대회위원회의 강화와 상설공투체
건설논의와 연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 아셈 공동투쟁의 경험이 민중대회위원회와
상설공투체 논의의 강화 발전에 기여하여야 하였으나 현실의 결과는 부정적이다.
이것은 공동투쟁 연대투쟁의 원칙과 정치적 방향이 합의되고, 이것이 결정, 집행,
평가되는 과정이 부재하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가 상설공투체를 지향하고
건설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구조를
정비하고, 상근자를 확보하는 것 이전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상설공투체를
왜 만들려고 하는가? 그리고 이것의 바운더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형식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어떠한 정치투쟁의 방향을 누구와 공유하고,
이렇게 공유된 내용을 어떠한 조직형식으로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상설공투체의 핵심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개별 단체의 실용적 필요에 의해
상설공투체가 고민되고 추진된다면 그것은 모래위에 쌓은 성과 같이 허망하게 해체될
수 밖에 없다.

나) 조직 형식의 정비로 상설공투체가 건설될 수 없다면, 또는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와 호소만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투쟁의 방향을 치열하게 논의하고, 의견을 수렴하고 합의하고, 정치적 발언에
대해 조직적으로 책임지려는 '운동의 기풍'을 만들어가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셈투쟁에 대한 치열한 평가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평가는 흠집내기가
아니라 지난 투쟁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이후 투쟁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이다. 상설공투체 건설의 핵심은 정치 투쟁의
방향을 책임있게 '결정'하고 이것을 '집행'하고
'평가'할 수 있는 조직 구조를 만들어 가는 점에 있다. 결정하고 집행하고
평가할 수 없는 조직 구조라면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조직의 계통선을 따라
질서있게 토론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 모든 논의와 평가점을 대중 앞에
공개하고, 사회적인 토론과 비판과 수렴 과정이 전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풍운동과 쇄신의 바람은 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어 확산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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